707__보이차- 이승만과 미군의 한국 주둔- 에버-레디. 한미동맹--- 뚱보강사 이기성
===
707__보이차- 이승만과 미군의 한국 주둔- 에버-레디. 한미동맹--- 뚱보강사 이기성
=====
707__이승만과 미군 주둔. 에버-레디. 한미동맹
- 뚱보강사
- 15:10
- 조회 16
- 추천 0
=
707__보이차- 이승만과 미군의 한국 주둔- 에버-레디. 한미동맹---14ok
뚱보강사 이기성
707__이승만과 미군 주둔. 에버-레디. 한미동맹
보이차에 관하여는 뚱보강사 칼럼 ‘#182__ 보이차와 효리’(2018-08-04), ‘#186_ 이소룡과 보이차’(2019-04-29), ‘#588__ 녹차 보이차. 월남 파병’( 2022-09-28)에서 약간씩 알아보았다. 보이차, 미생물과 찻잎의 신비한 공생… 보이차가 특별한 이유는... [헬스조선] 이지형 기자가 입력했다(2023년 7월 22일). 런던 뉴 본드 스트리트에 위치한 ‘소더비’ 본사. 소더비는 1744년부터 경매를 하고 있다. 경매에선 고풍스러운 포장에 쌓인 둥그런 보이차 한 덩이가 억대에 낙찰되기도 한다. 국내에서도 최근 보이차(普洱茶) 경매가 인기를 얻고 있다. 국내 경매 역시 수천 만 원에서 수억 원 대의 ‘골동 보이차’ 낙찰을 알린다. 보이차에 붙은 ‘마시는 골동품’이란 별칭이 괜한 게 아니다. 그럼, 보이차의 건강 효과는 어떨까?
“몸속의 해로운 기름을 제거”... ‘갈산’, ‘카테킨’... 중국 전통 의학서 ‘본초강목습유’ 책은 보이차는 “몸속의 해로운 기름을 제거하고 소화에 도움을 준다”고 해설한다. 보이차는 몸속의 해로운 기름인 체지방을 빼주는 한편으로 콜레스테롤도 낮춰준다. 보이차가 체지방 관리에 도움이 되는 건 폴리페놀의 일종인 ‘갈산’ 때문이다. 갈산은 췌장에서 분비되는 효소 ‘리파아제’의 활동을 방해한다. 리파아제는 우리 몸으로 들어온 지방을 분해해 체내로 흡수되게 하는데, 갈산은 이 작용을 방해한다. 지방이 흡수되지 않고 몸 바깥으로 배출되게 하는 것이다.
보이차의 폴리페놀 성분 중엔 ‘카테킨’도 있다. 카테킨은 항산화 효과가 뛰어나다. 항산화란 몸속에서 생성되는 활성산소가 몸을 산화시켜 세포를 노화시키고 염증을 일으키는 작용을 막는 것을 말한다.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 것도 바로 이 카테킨 성분이다. 카테킨이 충치를 억제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 ‘보이’는 중국 발음으론 ‘푸얼’이다. 중국 윈난성의 푸얼이 원산지여서 붙은 이름이다. 다양한 차 중에서 유독 강한 풍미로 유명하다. 제조 과정이 남다르다. 3단계: ① 찻잎을 가열한 후 수분을 적당히 머금게 해서 ② 대나무 통이나 상자에 넣어 미생물이 번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다. ③ 미생물이 분비하는 효소에 의해 찻잎이 발효되면서 보이차가 탄생한다.
이승만과 미군의 한국 주둔
정성수 페친이 “이승만 대통령 감금 작전인 ‘에버-레디’에 대한 글을 올렸다.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오전 3시 30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의 '폭풍 작전' 계획에 따라 38선 전역에 걸쳐, 기습적으로 대한민국을 침공(남침)하면서 발발한 전쟁이다. 유엔군과 중국인민지원군 등이 참전하여 세계적인 대규모 전쟁으로 비화될 뻔하였으나, 1953년 7월 27일 22시에 체결된 한국휴전협정에 따라 일단락되었다.
[조선일보] 2017년 7월 13일, 양상훈 칼럼 제목은 ‘작전명 에버-레디(Ever-ready)를 아십니까?’이다... 에버-레디 작전은 6·25전쟁 중이던 1953년 5월, 유엔군 사령부가 극비리에 수립한 작전 계획이다. 중공군 격파 작전이 아니라, 대한민국 이승만 정부를 붕괴시키고, 이승만 대통령을 감금하는 작전이다. 이승만의 치열한 대미(對美) 투쟁은 한미 관계를 파국 직전의 갈등상황으로 까지 몰아갔고, 급기야 미국 정부는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이승만 대통령은 왜 그토록 미국에 투쟁적이었을까? 1951년 시작된 휴전 회담을 이승만 대통령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국토와 국민이 결딴났는데, 통일도 없이 분단된다는 것은 새 지옥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7만 명 이상의 미군 인명 손실과, 막대한 전쟁 비용으로 인한 미국 국내 여론 악화로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웠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대로 휴전이 이뤄지면 미군은 한국을 떠날 것이고, 고립된 섬으로 남는 한국이 중·북·소련에 의해 적화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보았다. 아니더라도 일본 세력권에 편입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전망이었다. 그런데 미국이 그걸 원하고 있었다.
--- '외교의 세계'...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1953년 5월부터 7월까지 3개월간 '이승만 대(對) 미국'의 살벌한 갈등은 약소국이 살아남는 지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한편의 교과서다. 노르웨이 대사를 지낸 최병구 씨가 지은 '외교의 세계'는 그 드라마 같은 3개월을 잘 기록하고 있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죽자 휴전 회담이 다시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2일, 중공군의 북한 주둔을 허용하는 휴전 협정이 맺어지면, 한국군은 유엔군에서 이탈해 독자적으로 싸울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국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클라크 주한 유엔군 사령관은 ‘이승만 대통령 보호 감금’과 ‘임시정부 수립’을 미국 정부에 건의하기에 이른다. 미국 국무부까지 동조해 1953년 5월 에버-레디 작전이 수립된다. 당시 한국은 독자전쟁이 불가능했다. 전쟁 유류가 단 2일치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이 독자 전쟁을 선언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한·미 동맹(상호방위조약) 체결이었다. 그것만이 공산 세력과 일본의 재침을 막는 유일한 방패라고 보았다. 이승만 제1,2,3대 대통령(재임: 1948~1960)에게는 미래의 일을 지각하는 초감각적 능력, 불세출의 예지(豫知)가 있었다. 1953년 7월에 맺은 휴전(정전,停戰) 협정(Korean Armistice Agreement)은 6.25 전쟁을 휴전하기 위해서 유엔군(총사령관 마크 클라크)과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국 인민지원군(사령원 펑더화이) 간에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협정으로 한국어, 영어, 중국어로 작성되었다.
미국 국내에선 한국과의 동맹은 불필요하다는 견해가 다수였다. 한국은 가치가 없는 나라였다. 그런 터에 한국이 미국을 동맹으로 만들기 위한 방책이라면 오직 하나 미국을 '죽을 각오로 물고 늘어지기', 곧 '함께 죽자'고 나서는 것 뿐이었다. 미국 국무부, 국방부, 합참의 합동 회의에서 격론이 이어졌다. 수십 년 미국에서의 활동을 통해 축적해 둔 종교계와 군부를 비롯, 미국 조야에 두루 포진해 있던 이승만 대통령의 인맥이 알게 모르게 작용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5월 30일 한국 이승만 대통령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 외에는 6·25전쟁을 중단할 방법이 없다는 결론이 났다.
에버-레디 폐기, 포로 석방
1953년 5월 30일 에버-레디는 폐기됐다... 한국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같은 날 이승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미국 제34대 대통령(재임: 1953.01~1961.01)에게 친서를 보내 ‘한·미 동맹을 맺으면 휴전에 동의하겠다’고 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동맹이 아니라 미정부의 '한국 방어' 성명과 군사 지원 행정협정을 맺자고 했다. 10억 달러 경제원조도 제시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조약'이 아니면 미국을 붙잡아둘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1953년 6월 8일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포로 송환 문제가 타결됐다. ‘한·미 동맹’을 못 얻었는데, 휴전이 목전에 온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6월 18일에 35,000여명 반공 포로 석방이라는 극약 처방을 내린다. 휴전회담을 무산시킬 조치였다. 느긋하고 배포가 두둑한 처칠이 식사 중에 숟가락을 떨어뜨렸을 정도이니, 그 사건이 얼마나 기상천외한 국제적 폭거였을지 짐작할 만하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 다음 날 주한 미 대사에게 "이것이 자살 행위라 해도, 그것은 우리의 특권이다."고 말했다. 한·미 동맹 없이 휴전이 되면, 자살도 불사하겠다는 결의였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을 '정신 착란자'라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굴하지 않았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한·미 동맹 없이 휴전되는 것은 한국에 대한 사형 집행장'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7월 9일, 휴전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약속과 함께, 한·미 동맹조약 초안을 제시했다.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이 향후 어떤 망령된 일이라도 벌일 수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아이젠하워는 어쩔 수 없이, 방위조약을 맺을 특사를 한국에 파견했다. 그러나 미국측 초안에는 '한쪽이 공격 받으면 다른 한쪽이 자동 개입한다.'는 동맹 조약의 핵심 부분이 없었다.
'가쓰라-테프트 밀약' 배신, 한·일 합방과 한반도 분단에 대한 빚
이승만 대통령은 미 특사에게 반세기 전의 '가쓰라-테프트 밀약'에 대해 따져 물었다. 배신행위였다고 다그치며, 한·일 합방과 한반도 분단에 대한 빚을 갚으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전쟁 참여는 행정부 아닌 상원의 권한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우회로를 택한다. '한 쪽에 대한 공격을 다른 쪽에 대한 공동 위험으로 보고, 각자 헌법에 따라 행동한다'는 조항을 신설하고, 바로 그 다음에 '미군의 한국 주둔'을 규정했다.
미군이 주둔하면 유사시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외교 귀재의 발상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휴전이 성립됐고, 8월 8일 서울에서 한·미 외교장관이 동맹 조약에 서명했다. 한·미 동맹은 국민의 피와 모든 것을 건 한 지도자의 필사적 투쟁으로 이뤄낸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 동맹으로 "우리 후손들이 여러 대에 걸쳐 갖가지 혜택을 누릴 것"이라고 했는데 그대로 적중했다.
--- [조선일보] 양상훈 칼럼... 한강의 기적은 한·미동맹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에 힘이 없다"고 토로했다. 우리는 많이 성장했으나 더 큰 나라들에 둘러싸여 있다. 한국의 지도자는 한·미 동맹사(동맹 역사)를 읽고 또 읽어야 한다... 국내 종북 주사파들은 지금까지도 이승만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그러나 혜안을 가진 국부 이승만 대통령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탁월한 인물이었고, 세계 역사 속에서도 길이 남는 그런 인물이기도 했다. 전세계를 통틀어 봐도, 미국과 대등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 밖에 없다. 미일방위조약 등이 있지만, 한미상호방위 조약에는 못 미치고 격이 한참 떨어진다.
현실에서도 보라... 주일 미군은 4만 8000여 명으로 한국(2만 8500여 명 주둔)의 거의 2배이고, 전략 자산은 몇 배가 되지만, 주일미군 사령관은 중장으로 대장인 주한미군 사령관의 직속 예하부대인 것이다. 즉,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주한미군을 지원하는 단순부대인 것이다. 다시 한 번 국부 이승만 대통령에게 경의를 표하며, 하늘에서 살피고 계신 덕에 대한민국이 있고, 우리 국민이 있는 것이다.
평범한 시민들이 지키는 한미동맹
경기도교육청에서 근무한 이수룡 페친님이 ‘한미동맹’에 관하여 글을 올려주셨다. 최규남 님의 블로그 ‘진정한 애국자’, 2023년 7월 22일자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평범한 시민들이 지키는 한미동맹... 올해는 한미동맹이 결성된 지 7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다. 대한민국이 오늘날 이러한 풍요와 자유를 누리는 힘은 결국은 한미동맹의 덕분이라고 감히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경제성장도, 국방도, 사회 각 분야의 발전도 한미동맹의 덕분인 것이다.
--- 민노총, 전교조, 민중당, 종북좌파 세력 일부는 광화문 미대사관 앞에서 5년째 미군철수를 주장하고... 어렵게 맺은 ‘한미동맹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북괴는 70년 동안 줄기차게 미군철수를 주장하고 있다. 이게 북괴의 통일전략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먹고 살고 있는 일부 소수의 국민들이 배은망덕하게도 한미동맹 파기를 주장하고, 미군철수를 주장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세력이 민노총, 전교조, 민중당, 그리고 일부 붉게 물든 국민들이다. 광화문 미대사관 앞에서 무려 4~5년 정도 동안 미군철수를 주장한 종북좌파 일부 불순한 세력들이 있었다. 그들은 집회신고를 통해 그 자리를 확보하고 하루 24시간, 일 년 내내, 그것을 무려 5년 동안이나 해왔다. 아마 미국 대사관도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자기들 집 앞에서 한국을 떠나라고 외치는 배은망덕한 대한민국 국민, 특히 철없는 어린 대학생들이 미군철수를 주장하며 피켓시위를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미대사관지킴이 시민모임과 자유연대
그런데 기적같이, 피켓시위를 하던 이 자리를 빼앗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미대사관지킴이 시민모임’과 ‘자유연대’ 분들이다. 이분들이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민중당의 아이들이 방심한 틈을 타서, 전광석화 같이 그 자리에 집회신고를 하고, 그 시위하던 자리를 탈환한 것이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이 두 단체에게 시위 자리를 빼앗긴 종북 세력들은 미대사관 길 건너편 세종대왕 동상 옆에 붉은 텐트를 치고 지금도 시위를 하고 있다.
--- ‘미대사관지킴이’ 봉사자들은 쪽잠을 자면서 자리를 지킨다... ‘한미동맹을 유지하기’ 위하여... 겨우 탈환한 미대사관 앞의 시위장소를 다시 뺏기지 않기 위해서는, 이 자리를 꼭 지켜야 한다... 그래서 ‘미대사관지킴이 시민모임’과 ‘자유연대’의 봉사자들이 지금도 빼앗은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분들도 역시 하루 24시간, 밤낮주야로, 일 년 내내... 그래서 오늘이 1200일째 되는 날이 되었다. 이 자리를 지키는 봉사자들은 1평도 되지 않는 그 좁디좁은 칸막이 속에서 주무시고, 식사도 하고, 쪽잠을 자면서 지키고 있다. 그러나 전기도, 물도 없다. 겨울 새벽의 살을 베고, 뼛속까지 얼어붙게 하는 추위, 여름의 질식할 것 같은 시멘트 바닥과 아스팔트의 열기와 무더위, 밤이면 온 몸을 덮치는 살인적인 모기떼와 싸우면서 ‘미대사관지킴이’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비눈바’로 광화문 미대사관 앞 그 자리를 지켜내고 있다.
그러나 일반 시민들은 아무도 이런 사정을 모른다. 그냥 무심코 지나가는 조그만 초소일 뿐이다. 지붕에 검은 우산이, 비가 오면 천막이 처 있을 뿐인 이 장소를 누가 미대사관을 자발적으로 지키는 시민들의 초소라 하겠는가? 전철 5호선 광화문역에 2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15m 전방, 미대사관 길 건너기 직전에 2개의 초소가 있다. 혹시 지나가는 길이 있다면, 그 초소에 격려의 인사를 하면 어떨까? 그 자리를 지키는 분은 82세의 허리 굽은 노인, 80이 가까운 해병대 월남파병 용사, 가녀린 여성분이 건강하게 웃으면서 지키고 계신다. 정말 울컥해지는 장면이다.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 한미동맹도 공짜가 아니다. 오늘도 그 초소 앞에서도 미군철수를 외치는 작달만한 어린 여자애를 보면서 “언제 철이 들것인가?”하며 혀를 차시는 어른들을 보면 정말 가슴이 찌릿하고, 시리다. 그분들이 소리 없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한미동맹을 지키는 그 수고가 정말 고맙다... 미국 대사관 직원들도 지나가면서 “Thank you!”하고 인사를 한단다. 다시 한 번 더 다짐하자.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누군가의 피와 땀과, 눈물과 수고로 지켜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미동맹’ 지킴이, 광화문 미대사관 앞지킴이, 여러분들에게 정말 깊고, 뜨거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소나무/후원단체:자유정의시민연합, 한국 NGO연합, 자유연대 외 다수...
--- 월남전 파병 요청과 한일 청구권 협정... 대한민국 국군은 1964년 9월 11일 1차 파병을 시작으로, 1966년 4월까지 4차에 걸쳐 박정희 정부 하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민국 전투부대를 파병했다. 한국의 파병 제안과 베트남 정부 및 미국의 요청에 따라 행해진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 해외 파병이었다. 대략 5만 명의 대한민국 군인이 베트남에 상주하였고 장기, 단기 체류한 대한민국군의 총합은 대략 30만 명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을 괄시한 미국 35대 케네디 대통령(재임: 1961.01~1963.11)이었지만, 케네디 대통령이 월남전의 늪에 빠졌을 때, 월남 파병으로 케네디를 도운 결과, 한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한일 청구권 협정과 막대한 월남전 전쟁지원금을 챙겨, 한강의 기적을 만드는 발판을 얻을 수 있었다.
한국 정부는 ‘베트남 전쟁의 베트남화 정책’에 따라, 1971년 12월 4일 제2해병여단의 철수를 시작으로, 1972년 4월 1일까지 9476명의 병력을 철수시켰다. 반면 2개 보병 사단을 주축으로 한 전투 병력(3만 7000여 명)은 1973년 초 휴전이 될 때까지 계속 잔류시켰다. 이로써 주 베트남 한국군의 병력 규모는 1972년 후반기부터 미국의 지상군 규모를 능가하여, 참전국 가운데 가장 많은 병력으로 남베트남군을 지원하고 있었다.
주베트남 한국군의 제2단계 철수는 1973년 1월 8일, 파리에서 체결된 휴전 협정의 규정 사항인 “모든 외국 군대는 휴전 후 60일 이내에 베트남으로부터 철수한다.”는 조항에 따라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군은 1973년 1월 30일 125명의 선발대가 항공편으로 철수하였으며, 3월 14일까지 본대가 철수하고, 3월 23일 후발대 118명이 항공편으로 철수함으로써, 남베트남에 주둔하였던 모든 부대가 철수를 완료하였다.
[참고] 이기성, ‘#182__ 보이차와 효리’, 뚱보강사, 2018.08.04. 조회 725.
https://kg60.kr/cmnt/2342/boardInfo.do?bidx=571703
[참고] 이기성, ‘#186_ 이소룡과 보이차’, 뚱보강사, 2019.04.29.조회 318. https://kg60.kr/cmnt/2342/boardInfo.do?bidx=608873
[참고] 이기성, ‘#588__ 녹차 보이차. 월남 파병’, 뚱보강사, 2022.09.28.
https://kg60.kr/cmnt/2342/boardInfo.do?bidx=829115
[참고] [헬스조선] 이지형 객원기자, 2023.07.22.
https://n.news.naver.com/article/346/0000063055?cds=news_edit
[참고] 정성수.
https://www.facebook.com/sungsoo.chung.5
[참고] 이수룡, 경기도교육청 근무, 2023-7-22.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35155876245
[참고] 최병구, <<외교의 세계>>, 평민사 출판, 2016.05.30.
[참고] 블로그, 진정한 애국자, 최규남.
https://blog.naver.com/c23591gn/223163117642
[참고] [조선일보] 양상훈 칼럼, 작전명 에버-레디(Ever-ready)를 아십니까? 2017.07.13.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7/12/2017071203206.html
[참고] 김대용, 카카오스토리, ‘평범한 시민들이 지키는 한미 동맹’, 2023년 7월 24일. https://story.kakao.com/_FSgWk8/GW0JzBjVFbA
---
- 연락처010-3732-7399
- 이메일sk7chang@naver.com
- 관리자경기고 60회 동기회
====
707__보이차- 이승만과 미군의 한국 주둔- 에버-레디. 한미동맹--- 뚱보강사 이기성
====
707__보이차- 이승만과 미군의 한국 주둔- 에버-레디. 한미동맹--- 뚱보강사 이기성
경기고 60회 동기회
707__이승만과 미군 주둔. 에버-레디. 한미동맹
kg60.kr
==
707__보이차- 이승만과 미군의 한국 주둔- 에버-레디. 한미동맹--- 뚱보강사 이기성
====